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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복지뉴스 ‘제25회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공모’ 수상작 소개-⑥
2016-04-18 09: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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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부문 장려작 ‘특별한 탁구장’ 등 2편

 
고용노동부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매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현상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제25회를 맞은 올해의 공모전 주제는 ‘함께 일하는 행복한 일터’로, 부문별로 에세이, 인쇄매체디자인, 사진 등 총 28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에 본지는 부문별로 총 7회에 걸쳐 작품을 소개한다. 여섯번째는 에세이 부문 장려작 두 편이다.


특별한 탁구장

고양 시에 한 후미진 골목을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곳 2층에 탁구장 하나가 있다. 여기는 주택가라 인적도 매우 드물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게 되면 ‘핑-퐁 핑-퐁’ 소리가 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저기 한 구석 탁구대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 분이 탁구레슨을 하고 있다. 이 분의 이름은 바로 홍성길 관장님이다.

“관장님 저 종호 왔어요. 그동안 잘 계셨어요?”
3개월 만에 왔는지라 관장님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겨주셨다.

“저 요번에 충북사랑 오픈대회에서 우승했어요.”
나름 생활체육 탁구대회 중 큰 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자랑스럽게 관장님께 말을 전했다.

“이제야 우승 했냐! 진 작에 우승해야할 것을...”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관장님이지만 내 우승을 내심 기뻐하시는 표정을 지으셨다.

홍성길 관장님은 선천적 지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다. 처음에는 목각 일을 하려고 하였으나 탁구의 매력에 빠져 25세에 탁구장을 차린 후 30년간 운영 중인 역사 깊은 탁구장이다. 그동안 많은 탁구고수들이 홍 관장님 손에 배출되었다. 전 탁구 국가대표인 김정현 선수와 장애인 국가대표 탁구선수, 생활체육 탁구고수 등 많은 탁구고수들이 배출되었다. 탁구장 이름도 홍성길 관장님의 ‘길’자와 김정현 선수의 ‘현’의 만나 ‘길현’으로 이름을 바꾼 지도 20년이 되간다.

“잘 지냈니?
짧은 한마디에 많은 것이 내포되었다. 관장님은 평소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으신다. 현재 나는 청주에서 대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고양 시에 있는 탁구장을 2달에 한 번 꼴로 가고 있다. 그래서 관장님 한 마디면 나는 탁구적인 내용과 인생고민 등을 털어놓는 답을 해야 한다.

“네! 요번에 몸이 생각보다 가벼워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우승한 거 같아요. 근데 여전히 수비가 안 되네요.”

사실 관장님은 레슨을 할 때에 공격탁구를 강조하시고 화 드라이브 위주로 가르치신다. 그래서 우리 탁구장은 수비를 잘 하는 사람이 없다. 가르치시는 제자들에게는 발 빠른 다리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공격을 가르치신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탁구장에 비해 회원들의 수비는 좋지 않은 편이다.

“네가 급해서 손이 먼저 나가니까 그렇지.” 이리로 와.(탁구레슨 테이블로 불려갔다.)
인생고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관장님에게 끌려간 나는 반성탁구를 치게 되었다. 그렇게 반성탁구를 치는 중 관장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관장님 왜 우리 탁구장은 수비는 안 가르치고 공격 위주로만 가르쳐요? 수비를 잘하면 좀 더 쉽게 상대를 이기지 않나요?”
그냥 레슨을 받는 무의식중에 말을 꺼냈다.

“만약 내가 가르친 제자가 어디 가서 공격 못한다고 하면 장애인이 가르쳐서 공격 못한다고 욕할 것 아니니. 나는 그 소리는 절대 못 듣는다.”

관장님의 이 말씀이 나에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관장님의 공격탁구를 배우려고 많은 고수들과 어린 탁구 선수들이 탁구장에 찾아온다. 나는 단순히 관장님이 공격탁구가 수비탁구보다 승률이 높기 때문에 강조하는 줄 알았지만 저런 뜻이 내포 되어 있는지는 몰랐다. 한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반성탁구가 끝나고 관장님이 한 마디 꺼내셨다.

“술 한 잔하고 갈래?”
20살에는 관장님과 1주일에 두 번이상은 술을 마셨지만 군 전역 이후로는 일 년에 한두 번 마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동한 못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조용하고 넓은 탁구장에서 탁구대 위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치킨과 맥주를 두고 관장님과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아까 관장님이 꺼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관장님 아까 하신 이야기 말인데요. 관장님 정도 제자들 키웠으면 이제 공격탁구 위주로 고집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관장님이 10초 동안 생각을 하시더니 그제 서야 말문을 여셨다.
“나는 아직도 나한테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지고 오면 그게 항상 두렵다. 네가 어디서 지면 제일 열 받는 게 바로 나야 그래서 네가 지고 오면 반성탁구 시키는 게 그 이유다.”
나는 관장님과 반성탁구를 하면 매번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관장님은 꾸준히 나에게 반성탁구를 시켰다. 그 이유를 알았더라면 기쁜 마음으로 쳤을 것이다. 앞으로는 반성탁구를 할 때에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관장님 근데 아까 그 분 있자나요. 그냥 있다가 가신 건가요?”
아까 한 분이 레슨 상담을 하러 왔는데 레슨 상담을 맞추더니 30분 뒤에는 사라지셨다.
“응 그래 레슨 상담 받을 때 누가 레슨 코치냐고 묻더라. 그래서 나라고 하니까 나중에 온다고 하고 가더라. 너도 수십 번 봤잖니?”

탁구장에 간혹 와서 레슨 상담만 받고 그냥 사라지는 경우를 매우 많이 봤다. 나는 탁구를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익숙하였지만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관장님의 휠체어 타고 있는 모습에 많은 편견이 있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돈 내고 배우는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코치에게 배우려고 하지 장애인에게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이런 일을 항상 겪고 계시는 관장님은 항상 무덤덤하셨다. 하지만 항상 이런 일을 겪은 날에는 기분이 안 좋은 신 것은 분명하다.

“저기 관장님, 혹시 관장님은 그래서 그런 일을 겪으면서 복수를 제자들의 공격탁구로 하시는 거 아니에요?”

관장님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큰 소리로 웃으신다.

“하하하하 그래 내 속마음이 바로 그거다. 너 옛날에 초등학교 꿈나무 대회 나가서 다른 학교 애들 다 이기고 우승했잖니. 네가 다 이겨서 학부모들이 항의해서 그 뒤로 그 코치가 나를 미워하는 거 같더라. 저번에 그 코치랑 얼굴 봤는데 나한테 말도 안 꺼내더라.”

관장님이 평소에는 자랑을 안 하지만 이때에는 자랑스럽게 과거 이야기를 꺼내셨다. 관장님이 키운 제자가 탁구로 이기면 기뻐하시는 것 같다. 한참을 그동안 못 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려고 하자. 관장님은 택시비를 하라며 5만원을 주셨다.

“관장님 저 가요. 2달 후에나 올 수 있을 거 같아요.”
“어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술자리에서 관장님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장님의 인생 스토리를 들으면서 최소한 책은 나와야 된다 생각하고 크게는 영화 한 편 나와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였다. 내가 군대에서 읽은 성공 스토리 책을 보면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들이 참 많다. 또한 단점을 장점으로 활용하여 성공한 스토리도 많다. 관장님과의 대화를 나눈 후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성공한 사람, 단점을 장점으로 활용하여 성공한 사람이 바로 관장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장님이야 말로 진정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관장님이 탁구장을 여신 것은 30년 전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탁구장을 차린 것은 말 그대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거기에 관장님 본인이 하기 힘든 공격탁구를 밤새 연구하여 분석한 다음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국가대표를 발굴하고 수많은 생활체육 고수들을 키워냈다. 본인의 단점이 장애지만 이 장애에 굴복하지 않고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공격탁구라는 장점을 탄생 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는 안 돼. 나는 남들에 비해 뒤떨어져. 나는 부족해’ 이 모든 말들은 관장님을 보면 할 수 없게 된다. 내 자신도 관장님을 보면 항상 반성하게 된다.

관장님은 전 탁구 국가대표 선수인 김정현 선수를 가르칠 때 당시 시도하지 않은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 분석을 하고 중국탁구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어 공부도 하셨다. 더 좋은 선수로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하셨다. 이런 노력들 때문에 현재의 관장님과 우수한 제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많은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현실 속에 편견과 맞이하는 벽들에 좌절을 겪을 것이다. 홍 관장님의 이야기를 보고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 이는 장애를 가졌다고 예외가 되지 않는다. 충분히 노력하고 연구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이다.

다섯 살, 우리오빠

우리오빠는 장애인이에요. 나이는 마흔 살이지만 다섯 살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요.
아주 어릴 적, 우리 오빠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은 “바보”였어요. 어느 동네에나 한명씩 있다는 바보, 그게 바로 우리 오빠였어요. 엄마는 오빠를 ‘사람 구실’하게 만든다며 참 많이 애 쓰셨어요. 특수학교 대신 일반 중, 고등학교에 보내며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어요. 전국에 있는 큰 병원을 전전하며 오빠의 머리를 고쳐 줄 의사 선생님도 찾아보았고요.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오빠의 시간은 다섯 살에서 멈춰 버린걸요.

아,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비가 많이 오던 날, 엄마와 함께 오빠의 학교 앞에 우산을 가지고 갔어요. 교문에서 오빠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우르르 고등학생 오빠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우리 오빠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어요. 행동이 정말 굼뜨거든요. 드디어 교사(校舍) 현관으로 오빠가 보였어요. 엄마는 오빠에게 가려다 그만 걸음을 멈추었어요.
“엄마?”
올려다 본 엄마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어요.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의 엄마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시곤 다시 오빠를 향해 걸었어요.
서너 명의 고등학생 오빠들이 우리 오빠를 툭툭 치며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어요. 교복 바지에는 누군가가 발로 찬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고요.
“너희 영인이 친구들이니?”
엄마가 다가가 말을 걸자 무리의 오빠들은 각자 흩어져 가버렸어요. 그날, 엄마는 집에 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항상 들리던 어묵가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고요. 한 번씩 눈을 크게 감았다 뜨기만 하셨어요. 저는 그게 눈물을 참는 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저도 눈물이 날 때 마다 그렇게 눈을 꼭 감거든요. 엄마는 열심히 눈물을 참고 계셨어요.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집에서만 지냈어요. 늘 오빠를 데리고 다니던 엄마가 새벽부터 자정까지 식당일을 해야 했거든요. 저도 엄마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냉장고에서 대충 반찬을 꺼내 오빠와 둘이 먹어야 했어요. 친구들이 다 가는 학원도 다녀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한 번도 엄마를 원망한 적은 없어요. 집안 형편이 나쁜 게 엄마 탓은 아니니까요.

저는 집에서 오빠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오빠는 오전 시간에는 라디오를 듣고, 오후가 되면 텔레비전을 봤어요. 가끔씩 제가 오빠에게 산수며 영어를 가르쳐 주긴 했지만, 어제 가르쳐 준걸 또 틀리고 못 알아들으면 화가 나서 며칠은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오빠와 함께 집 앞 구멍가게라도 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리곤 했어요. 저는 익숙한 듯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어요. 화가 나서 쫓아가 소리 지르고, 싸우는 건 이미 오 년 전에 지겹도록 한 걸요.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요. 엄마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작은 식당을 차렸어요. 근처 공사장에 밥을 해주며 점점 손님도 늘어갔어요.
늦은 오후 시간, 식당으로 장애우 들이 만든 수제 비누를 파는 사람이 올 때가 있었어요. 엄마는 몇 천 원 하는 그 비누를 만 원짜리를 건네며 사곤 하셨어요.
“너희 오빠도 저렇게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느 날부터 엄마는 식당에 오빠를 데리고 나갔어요. 오빠는 방이나 유리를 닦는 일을 하다, 바쁠 때는 물과 반찬을 서빙 하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이상한 눈빛으로 보던 손님들도 언제부턴가 오빠가 가져다주는 음식이라 더 맛있다고 했어요.

집에서만 지내던 오빠가 나름의 일을 갖게 되자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손님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기도 하고,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소소한 일거리를 찾아서 하기도 했어요. 일을 한다는 것, 그건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오빠를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어느새 오빠는 동네 유명인사가 되었어요. 함께 다니면 늘 듣던 “바보”라는 말 대신 “우리 영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어요. 옆집 족발가게 아저씨도, 앞집 횟집 사장님도, 멀리 있는 과일가게 아주머니도 모두 “우리 영인이”라고 불렀어요.

“우리 영인이, 이따 삼촌이랑 드라이브 하고 올까?”
“우리 영인이 나왔네. 여기 사과 좀 몇 개 가져가서 먹어.”
“이거 지금 삶은 건데 우리 영인 씨 주세요.”

오빠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어요. 좋고 싫다는 의사표현도 확실해지고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생겼어요. 사람들의 따뜻한 말과 관심으로 오빠는 성장 하고 있었던 거죠.
엄마는 늘 고마워했어요. 오빠에게 베푸는 사람들의 온정에 말이에요. 그러나 저는 오빠를 대할 때, 사람들 표정에서 그들이 얻어가는 순수한 마음에 대해 생각했어요. 오빠는 그저 동정 받는 존재가 아니라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저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어느 날은 오빠가 붕어빵을 딱 하나 사서 손에 들고 집에 왔어요. 글쎄 절 주려고 자기는 먹지도 않고 가져온 거 있죠? 한겨울, 빨개진 손끝으로 내민 붕어빵. 저는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어느 날 새벽, 쿵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어요. 그리고 곧이어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놀라 나가보니 오빠가 화장실 앞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태어나 처음 119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갔어요. 정신없는 엄마를 대신해 수속을 밟고 검사준비를 마쳤어요.

검사 결과는 “뇌출혈.”
급하게 수술 일정을 잡고 거의 실신 하다시피 한 엄마를 진정 시켰어요. 어떤 순간에도 눈물을 참아 내던,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엄마가 처음으로 우는 모습을 봤어요.

6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수술 결과, 왼쪽 손과 다리, 언어의 장애가 예상 된다고 했어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오빠를 보며 참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렇게 착한 우리 오빠에게 뭘 얼마나 더 가져가야 만족할 런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병문안을 온 사람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오빠를 걱정했어요. 모두들 오빠의 앞날을 걱정 했지요. 지적장애 2급에 신체장애까지.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오빠의 “사람 구실”은 이제 저 멀리 가버린 듯 했어요. 엄마는 말씀 하셨어요.

“우리 영인이보다 내가 딱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야.”

오빠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국립재활원에서 3개월의 재활 치료를 받았어요. 그게 벌써 6년 전의 일이네요.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국립재활원에 방문해 재활 훈련을 받고 있어요.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있고요. 엄마의 식당에서 서빙일도 다시 시작했어요. 그러나 엄마는 오빠가 입원하는 동안 당신도 많이 아프셨고, 또 부쩍 힘에 부친다며 가게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돌아가시면 오빠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말이에요.

저는 인터넷으로 장애인직업훈련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마침 집근처 복지관에서 직업 재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이 사실에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엄마였어요. 오빠가 엄마의 품을 떠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평생 자라지 않는 다섯 살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어떤 심정일까요? 그건 겪어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일 거예요.

오빠는 지금 복지관에 다니며 직업재활 훈련을 받고 있어요. 훈련이 끝나면 엄마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고요. 누구보다 바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어요.

어느 날, 오빠가 만들어 온 쿠키를 손에 들고 엄마는 또 한참을 우셨어요. 동네 사람들도 모두 오빠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요. 쿠키 하나에 동네잔치라도 벌어질 기세였어요.

아직 오빠는 시작하는 단계예요. 험난한 여정이 될 지도 몰라요. 또 다시 오빠의 바지에 발자국을 낼 사람이 나타날 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더 심한 대우를 할지도 모르죠. 느리고 정확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도 있어요.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오빠에게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해요. 몇 배의 시간도 걸리겠죠.

그렇기에 오빠의 도전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봐요. 엄마의 식당에서 일하며 생긴 동네 사람들의 변화, 그 긍정의 힘을 믿어요.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만든 쿠키, 먹어보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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