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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복지뉴스 ‘제25회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공모’ 수상작 소개-⑦
2016-04-19 08: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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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부문 장려작 ‘공정검사 미희씨’ 등 2편

 
고용노동부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매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현상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제25회를 맞은 올해의 공모전 주제는 ‘함께 일하는 행복한 일터’로, 부문별로 에세이, 인쇄매체디자인, 사진 등 총 28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에 본지는 부문별로 총 7회에 걸쳐 작품을 소개한다. 마지막은 에세이 부문 장려작 두 편이다.


공정검사 미희씨

우중충한 하늘에 비까지 쏟아지는 날이었다. 출근 카드를 찍고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사무실은 텅 비어있다. 어제 들어왔던 신입

두 명은 그만뒀나 보다. 인사라도 하고 가지. 나는 장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고 과장님이 들어오셨다. 젖은 우산을 털며 과장님은 어제 들어왔던 신입이 모두 그만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오늘 지원자 한 명이 면접을 보러 온단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과장님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대체 왜 다들 하루 만에 관두는 거야? 일이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과장님의 투덜거림에,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 버튼키를 만드는, 우리 회사의 유일한 공정검사(QC)이다. 작업자들이 알루미늄 판을 기계에 투입하면, 기계는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알루미늄을 버튼 모양으로 가공한다. 공정검사는 작업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버튼이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한다.

사실 공정검사 일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수시로 기계의 상태를 확인하고 버튼의 치수를 체크해야 하지만,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신입들이 익숙해질 틈조차 없이, 단 며칠 만에 지레 겁을 먹고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공정검사의 핵심은 불량의 원인을 찾고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설계 도면과 프로그램에 대한 간단한 수준의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껏 우리 회사를 거쳐간 대부분의 신입들은 치수가 빽빽하게 적힌 설계 도면을 부담스러워했다. 영어 단어와 숫자로 이루어진 프로그램 화면에, 너무 어려운 것 아니냐며 기겁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로 신입들은 며칠 만에, 하루 만에,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은, 내가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인 내가 언제까지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다음 학기 복학이 결정된 상황이며, 개강까지는 약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두 달 안에 내 후임자를 양성하고 교육해야 한다. 그런데 새로 들어오는 공정검사마다 족족 나가버리니 과장님 입장에선 미칠 노릇인 것이다.

라인을 돌아다니며 제품의 치수를 확인하던 나는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과장님은 새로 온 지원자의 면접을 보고 있으리라. 이번 사람은 얼마나 버티려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급한 불량들을 바로잡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핸드폰 볼륨 버튼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입은 살짝 벌린 채, 재미있는 만화책이라도 보는 냥 흥미로운 눈빛으로 도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미희라고 소개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소아마비를 겪었다고 한다. 나는 미희씨를 데리고 라인의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그녀가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했지만, 다행히 회사 내부를 이동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미희씨는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볼륨 버튼이 우리 회사에서 만들어 졌다는 말에, 회사를 구경하는 내내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근무 현장에 금세 적응한 모양이다. 예감이 좋았다.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면서, 나는 미희씨에게 버니어 캘리퍼스를 보여주었다. 버튼의 폭을 재는 도구라는 설명과 함께 기구를 잡는 시범을 보였다. 할 수 있겠어요? 하는 물음에 미희씨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막상 손에 쥐여주니, 그새 잡는 법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한번 더 자세를 잡아 주었다.

버니어 캘리퍼스 사용에 익숙해 지는 데에는 보통 이틀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나 또한 처음 일을 배울 때, 하루 종일 쥐는 연습을 하고 나서야 치수를 제대로 잴 수 있었다. 아마 3일정도는 잡는 연습만 하셔야 될 거에요, 미희씨에게 연습할만한 제품 몇 개를 주며 말했다. 3일이라는 넉넉한 시간은, 내 나름대로의 미희씨에 대한 배려였다.

그러나 그녀는 무려 일주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치수를 잴 수 있게 되었다. 과장님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지금이라도 다른 지원자를 뽑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요, 나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확실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뎠다. 과장님의 조바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동안 미희씨가 버니어 캘리퍼스를 들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곤 항상 버니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조차 연필, 종이컵, 귤 등 버니어 캘리퍼스로 집을 수 있는 물건이면 모조리 집어가며 너비를 쟀다. 더디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의 신입들 중 가장 오래 버티며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일이 잘못될 경우, 모든 책임을 질 것을 약속하며 과장님을 설득했다. 그리곤 미희씨를 불러, 이번에는 프로그램의 좌표를 수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프로그램의 좌표를 수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올바르게 치수를 재는 능력과 정확한 계산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칫하다간 기계 고장이나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미희씨에게 버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버니어 캘리퍼스를 잘 잡을 수 있다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면서, 왠지 미희씨라면 잘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강한 확신에 가까웠다.

노트에 그림을 그려가며 개념을 설명했다. 미희씨 여길 보세요. 오른쪽이 왼쪽보다 두껍지요? 이걸 ‘편심’이 발생했다고 해요. 우리는 양 쪽 두께가 같아지도록 프로그램 좌표를 변경해줘야 해요. 그러려면 x좌표와 y좌표중에 뭘 수정해야 될까요?

“모…… 모르겠어요.”
미희씨는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분명 미희씨의 습득은 느렸다. 그러나 이 날 나는 같은 그림을 수십여 장을 그리며 미희씨에게 다시 설명했고, 미희씨 역시 쉬는 시간까지 반납해가며 나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퇴근 후에도 나에게 문자를 보내 질문을 퍼부었고, 나는 그녀에게 영상전화를 걸어 그림을 그려가며 답변해주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녀는 마침내 혼자서 좌표 수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미희씨에게 물었다. 미희씨는 첫 월급타면 제일 먼저 뭘 할거에요? 그녀는 대답대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소녀. 동생이라고 했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동생에게 좋은 보청기를 사줄 거란다. 그러더니 이것 저것 보청기 사진을 보여주며 어떤 것이 가장 예쁘냐고 묻는다. 나는 보청기에도 디자인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녀의 동생 또한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한다고 했다. 장애를 가진 탓에 취업이 어려워, 동생이 고장 난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며 미희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미희씨도 이제는 어엿한 공정검사잖아요, 앞으로 돈 많이 벌어서 좋은 거 많이 해주면 되죠. 그녀는 울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미희씨는 이후로도 몇 번의 사고를 쳤다. 특히나 대형 불량이 발생한 날이면 나와 미희씨는 과장님께 불려가 혼이 났다. 그 때마다 미희씨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자책했고, 나는 그녀를 달랬다. 다만 큰 소리로 호통을 치시던 과장님의 표정이, 어째서 약간은 흐뭇해 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건지.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희씨는 입사 2개월만에 공정검사 총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되었다. 나는 복학을 했고, 회사는 그만두었다.

두꺼운 전공 교과서를 품에 안은 채 지하철에서 졸던 나는 핸드폰 벨소리에 화들짝 깼다. 미희씨, 아니, 미희언니다.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언니는 어눌하게 바빴다고 답했다. 어쩜 연락 한 통도 없어서 서운했다던 언니는, 시간이 된다면 회사에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미희언니의 동생도 엊그제 공정검사로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거 정말 잘됐네요,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다 과장님 덕분이지-라며 수줍게 웃던 미희언니는, 사뭇 진지하게 고민이 있다고 했다. 뭔데요? 하고 묻자 언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글쎄, 우리 동생이 아직도 버니어 캘리퍼스를 못 잡아. 속 터져”
“언니! 개구리가 올챙이 적 기억 못하면 안 돼요!”
미희언니와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깔깔거렸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근육병’까지 앓게 되어 암담했다. 근육이 점차 약화되는 병이었다. 나중에 심장 근육까지 병이 진행되면 산소호흡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서는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을 눈앞에 뒀을 때 유서를 남기고, 쥐약을 준비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하지만 결국 목숨을 끊지는 못했다.…

3일째 되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꿀벌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눈앞에 참깨밭이 펼쳐진 것이다. 참깨가 무성하게 벌판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 참깨꽃 밀원을 찾아온 꿀벌 농가가 있었다.

왠지 들러 보고 싶었다. 가던 발길을 되돌려 양봉하시는 분과 인사를 나누는 순간, 꿀벌을 키우고 싶어졌다. 꽃가루와 로열젤리 등이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내 질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나아가 다른 많은 사람의 건강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삶에 의욕이 생겼다. 꽃가루, 꿀, 로열젤리를 조금씩 맛보고 집으로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꿀벌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고종형이 찾아와 나를 붙잡아 집으로 끌고 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나를 붙들고 목 놓아 우셨고,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꿀벌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깨밭에서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1년간 꿀벌 기술을 배우기 위해 양봉하시는 분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그 이듬해, 5월에 온도가 가장 높게 올라가 아카시아 꽃이 빨리, 많이 피는 대구로 이동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처음 대구에 갔다. 아카시아 향기가 온 산자락에 가득했다. 처음 대구 양봉장을 찾아가던 날, 어둡고 험한 산길을 밤새 헤매다가 낭떠러지에 미끄러져 옷이 다 찢어졌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새벽녘에야 겨우 양봉장을 찾을 수 있었다.

양봉장에 도착하니, 함께 온 이웃 양봉가가 품앗이로 채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도 못 먹고, 새벽부터 꿀 따는 일에 투입되었다. 내 평생 처음 꿀을 따 보는 거라 재미도 있고 신기했지만, 11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뒤 지친 상태로 땅바닥에 누워 곤한 잠에 빠지고 말았다. 오후 3시경에 겨우 일어나 서울로 이동한다고 해서 도와주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벌통 밖으로 벌이 나오지 못하게 소문을 닫고, 화물차에 벌통과 짐을 실었다. 이튿날 새벽, 서울 도봉산 자락에 도착했다.

대구에는 꽃이 한물갔는데 도봉산은 이제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 산자락 가득 싱싱한 꽃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피곤한 상태에서 무거운 벌통을 내리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벌통을 배치하고 빵에 꿀을 발라 먹었다. 빵과 우유가 아침식사였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기거할 천막을 쳤다.
좋은 날씨가 계속돼 질 좋은 아카시아 꿀을 딸 수 있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들려와 바쁘게 꿀을 땄다. 다행히 꿀을 다 따고 난 뒤에 비가 내렸다. 천막생활을 하는 양봉가들에게는 비가 가장 큰 고역이었다.

비바람이 지나가자 아카시아 꽃이 다 떨어져 버렸다. 전방 지역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까지 다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더는 아카시아 꿀을 딸 수 없었다. 2주 정도가 지나면 남쪽에 밤꽃이 핀다고 했다. 그때까지 소모된 벌을 번식시키기 위해 벌이 먹을 식량을 조금 비축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양봉하시는 분을 도우면서 2년을 보냈고, 그제야 꿀벌 10통을 분양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독립 양봉가가 된 것이다. 나는 영암 월출산 자락에 봉장을 잡았다. 벌통을 배치했는데, 장마가 계속되었다. 집에 꿀도 좀 갖다 드리고, 식량도 가져오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월출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화물차가 나를 들이박고 그대로 뺑소니를 쳤다. 나는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 넘어진 오토바이를 일으키고, 꿀통을 정리해 개울로 내려갔다. 흙을 털고 상처를 씻고 다시 일어서려니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해 왔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냥 쓰러져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나를 발견하고 택시를 잡아 준 뒤 병원에 갈 것을 권했다. 마침 자신이 오토바이 수리 센터를 하고 있으니 오토바이는 옮겨서 수리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 진료소에서 응급 처치만 받고 가려고 했으나, 의사는 큰 병원에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병원에 가지 않고 그 젊은이의 수리 센터로 돌아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가려고 하다가 가게에 딸린 방에 들어가 쉬게 되었다. 피곤한 탓인지, 응급으로 주사를 맞았기 때문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

저녁이 되어 일어나니 고통은 더 심해져 있었다. 병원은 내일 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내가 하지 말라고 하던 양봉을 하고, 오토바이를 사더니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심하게 꾸중하셨다.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이튿날, 아버지를 겨우 설득해 봉장에 들렀다. 벌통이 잘 있는지 걱정이었다. 아버지와 벌통을 살펴본 다음 봉장 천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벌과 오토바이를 산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통증이 심해도 밤새도록 참고 견뎠다. 결국 고통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와 병원에 가기로 했다.

외관상으로는 타박상이라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산중턱에 있는 봉장에서 마을 버스정류장까지 내려오는데,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뱃가죽을 움켜쥐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가 조금 부축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먼저 내려가신 아버지는 죽을 지경이 된 나에게 “버스를 놓칠 수 있는데 왜 빨리 오지 않느냐”며 화만 내셨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겨우 병원에 옮겨졌다. 의사가 말했다.
“장이 파열됐습니다. 어쩌려고 3일간을 그냥 방치해 뒀습니까?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옮겨야 되겠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정신이 희미한 상태로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실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틀이 지나 오전 10시경에야 깨어났는데, 장 파열 때문에 장과 뱃가죽 사이에 고인 죽은피를 한 동이 이상 빼냈다. 세 사람 몫의 피를 즉석에서 수혈을 받았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는 하는데 통증은 견딜 수 없었다.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간호사를 불러 진통제를 놓아 달라고 하셨다.

중환자실에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등 죽음의 문턱을 헤맸다. 그렇게 3일째가 되자 전도사님과 교인들이 심방을 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도를 해 주고 가셨다. 그러고 나서 어둠이 걷히듯 극심했던 통증에서 벗어나 정신이 들었다. 내진이 끝난 뒤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교통사고 후 이듬해 봄, 부모님은 내가 불편한 몸을 안고 양봉을 하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집도 없이 생활하면서 꿀벌 통을 안고 밀원을 찾아 천막을 치고 떠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질 좋은 꿀을 생산하려면 밀원지를 찾아야 하는데, 부모님과 맞서다 보니 1차 2차 아카시아 꽃 밀원지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웃 양봉의 도움을 받아 3차 밀원지인 서울을 지나, 경기도 양주, 송추 가마골에서 아카시아 꽃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 아카시아 밀원지에 오고, 좋은 날씨가 계속되어 질 좋은 꿀을 많이 생산했다. 주님의 은혜라는 생각에 그곳에 있는 교회에 꿀 한 병을 갖다 드렸다. 사모님은 목사님과 여러 성도들에게 꿀을 맛보게 하셨다. 질이 좋다며 많은 교우가 꿀을 주문해 주었고, 무일푼에 돈을 꽤나 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그토록 걱정하면서 반대하시던 부모님이 걱정이 되었다.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께 밤꿀을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 고향집에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 30군도 못 되었던 벌통이 120여 군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 후 해가 지날수록 점점 바빠졌다. 질이 좋은 꿀을 생산한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고객이 직접 현장으로 찾아왔다. 채밀과 로열젤리 생산 체험을 했다. 각종 봉산물들이 생산되기도 바쁘게 팔려 나갔다.

내 나이 서른이 됐을 때였다. 서울 구파발 지하철역 부근, 삼거리에 당시 내가 다니던 성민교회 목사님 아버지 소유로 있는 건물이 있었다. 나는 저렴한 가격으로 건물 한 칸을 얻어 목사님과 교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믿음양봉원을 개원했다.

꿀벌 사업은 그 뒤로 너무 바쁘게 잘 운영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그만두시고 밀원지를 따라 양봉장을 지키면서 꿀벌을 기르는 일에 적극 동참하셨다. 가까이에 살던 외사촌 누님이 가게를 맡아 나를 대신해 관리를 하고, 성민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게했다. 점점 사업이 확장되었고 바빠졌다.

목사님은 청년들 일자리를 마련해 주자고 하셨다. 근육병장애인 중 건강이 가장 양호했던 여자 청년 한 명, 건강한 남자 청년 한 명을 추천해 주셨다. 여자 청년은 가게 금전을 관리하고, 남자 청년은 나와 동행하면서 양봉장을 오가며 꿀벌 생산물을 확보하고 판매에 필요한 양봉 기자재 용품을 비축하는 일을 했다. 물량을 확보하기 바쁘게 물건들이 팔려 나갔다.…

사실 목사님에게도 근육병장애가 있었는데, 공감대가 형성된 탓인지 이곳저곳 살고 있는 중증근육병장애인들이 교회에 많이 출석하게 되었다. 서울 도심의 교통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매 주일 교회 차량을 통해 장애인들이 교회로 오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목사님과 나는 건물 두 곳에 있는 세입자를 내보내고, 중증근육병장애인들 공동생활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가게에 딸려 있는 방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주방과 화장실도 장애인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가게로 사용했던 공간은 중증 장애인 공동 사업장으로 만들었다. 교우들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여러 하청업체를 통해 비누박스 포장이나 젓가락에 비닐을 씌우기, 전자제품 조립 등을 했지만 작업 능률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수입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목사님과 나는 생각을 바꿨다. 중증 장애인들이 투병 생활과 노동을 동시에 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건물 안에 있는 가게를 하나 더 수리하여 꿀벌의 봉산물과 접목해 풀무원 건강식품 통일로 대리점을 개원했다.

당시 구파발 지하철역은 3호선 종착역이었다. 파주, 문산, 경기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이 이곳까지 자동차를 끌고 온 다음 지하철을 이용했다. 교통 요지였다.

풀무원 건강식품 대리점에서 많은 물품이 판매되었다. 무엇보다 대리점 사장단 교육을 통해 이웃 대리점들과 인맥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 축복이었다. 여러 대리점에서 내가 생산하는 봉산물(벌꿀, 로열젤리, 화분, 프로폴리스)을 판매하겠다고 했다. 주문이 빗발쳤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물 붓듯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꿀벌은 부지런하기 때문에 슬퍼할 시간도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이 실감 날 정도로, 근육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다. 꿀벌과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꿀벌들과 산 증인으로 살아온 것을“꿀벌이 함께하는 세상”이란 책을 썼다. 그리고 이제는 꿀벌을 배우고 싶어 하는 귀농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2군 꿀벌로 시작해 2년 동안 20군 정도를 번식해 자립할 능력이 되면, 양봉가로 독립시킬 계획이다.

나는 종일 전동휠체어에서 생활을 한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잠자리에 눕는 것까지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나로서는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무척 기쁘고 행복하다. 많이 부족하지만 살아 숨 쉬는 한,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하는 꿀벌 같은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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